원전부지조사를 할 때 제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활성단층의 존재이다. 미국에서는 원자력규제위원회의 기준인 ‘최근 5만 년 이내 변위가 한 번 발생했거나 최근 50만년 이내 두 번 이상 발생한 단층’을 활성단층으로 판단하며, 우리도 이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원전부지조사에서 활성단층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활성단층은 원전 운전기간 중에 변위가 다시 일어날 확률이 높으며, 이로 인한 지반거동이 원전 안전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일부 학자들이 원전밀집지대(고리원전 및 월성원전)에 인접한 양산단층이 활성단층이라는 주장을 제기한 바가 있지만 내가 자원개발연구소에 근무하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활성단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에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1992년에 양산단층대가 통과하는 양산 월평마을에서 활성단층이 처음으로 확인되고, 이어서 1995년 굴업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조사 과정에서 해저 활성단층이 발견됨에 따라 활성단층 문제가 원전 안전성의 현안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활성단층이 원전 안전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데도 불구하고 초기의 원전부지 선정과정에 이런 조건이 제대로 반영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에 한전에서 원전건설 책임자로 일하다 은퇴하신 분을 고문으로 모신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월성원전 지질조사를 수주했는데, 월성원전 지역의 불량 암질을 이미 경험한 바가 있어서 어떻게 끌어나가야 할지 몹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굳이 암질이 그렇게 나쁜 월성에 왜 원전을 건설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나쁜 암질을 상쇄할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고문께서 원전부지 선정과정에 지질조건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원전건설이야 국가 정책에 관한 사항이니 다른 여건이 크게 반영되기는 했어도 지질조건 또한 그만한 비중으로 고려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리원전은 이보다 먼저 건설되었으니 그 역시 지질조건이 크게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겠다.
그렇기는 해도 활성단층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을 때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건설계획에 반영했어야 했다. 하지만 운전 중인 원전을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이 발목을 잡지 않았을까 싶다. 건들기엔 너무 큰 문제라서 말이다. 게다가 그때까지는 활성단층이라고 단정할 만큼 지질학의 수준이 올라있지도 않았으니 활성단층 주장이 힘을 얻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러다가 양산단층이나 굴업도 단층이 활성단층으로 판명이 났고, 뒤이어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09년 정부 예산으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활성단층지도 및 지진위험지도 제작’을 수행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몇 년 전까지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 보고서에서 양산단층·울산단층·일광단층 등 17개 활성단층이 확인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서 은폐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공개했을 때 예상되는 논란을 피하고 싶기야 했겠지만 감춰서 될 일도 아니고 내용을 살펴보니 굳이 감춰서 얻을 이익도 없어 보인다.* 때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공식적으로 활성단층의 존재와 이의 영향, 그리고 그 영향을 제어하기 위한 내진설계에 대해 전문가들이 깊이 있게 논의했으면 좋겠다. 내진설계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여느 설계가 그렇듯이 상당한 안전율이 감안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기술로 예상할 수 있는 최대 지반거동을 기준으로 한다면 고리원전이나 월성원전에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최근에 학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지진보다 규모가 더 큰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지반거동을 일으키는 대규모 지진은 재발주기가 길어서 100년 남짓한 계기지진기록으로 향후 거동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2천년 이상 되는 역사지진기록이 매우 중요하다. 고리원전이나 월성원전 모두 역사지진 최대치를 감안해서 내진설계를 했으니 당시로서는 최선의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관련 학문의 발전으로 지난 2천년 동안 일어났던 것보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그 예측을 받아들인다면 내진기준이 높아진 신고리 3호기를 제외한 모든 원전이 기준에 미달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진설계는 지금까지 일어난 지진 중 가장 규모가 큰 지진이 같은 장소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지난 2천년 동안 일어난 최대 규모 지진보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는 것은 내진설계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인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보고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활성단층은 원전 안전성을 평가하는 기준인 활성단층과 차이가 있다. 원전 안전성 평가를 위한 활성단층은 제4기 후기(50만년)에 발생한 변위를 기준으로 삼는데 반해 이 보고서에서는 제4기 전체(180만년)에 발생한 변위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이 보고서에 언급된 활성단층이 모두 원전 안전성 평가와 직결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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