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전신인 자원개발연구소에서 두해 반을 근무했다. 원전부지조사를 수행하던 응용지질실에 배속되어 본소에서 지원업무를 담당했는데, 말이 좋아 지원업무지 그저 잔심부름이나 하는 정도였다. 현장조사에 참여하던 선배 대부분이 각 연구실에서 연구과제를 수행하다 차출된 상태이다 보니 출장이 끝나면 모두 자기 연구실로 돌아가 현장에서 올라오는 자료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덕분에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떼밀려 자료를 정리하고, 나중에는 영문으로 된 조사보고서 번역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 원전부지조사를 수행한 경험이 있는 기관이나 업체가 없어서 1980년대 초반까지 한전에서 연구소에 수의로 이를 의뢰하고, 경험 많은 외국회사가 관리하도록 했다. 최종보고서도 연구소에서 수행한 조사결과와 관련학과 교수들께서 작성한 기본보고서를 바탕으로 외국회사에서 작성했기 때문에 영문보고서가 공식적인 최종보고서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가 뭘 알아서 번역을 했을까. 돌이켜보니 용기가 가상했다. 어쩌면 그만큼 허술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모든 번역작업이 다 어려웠지만 특히 지진관련 부분은 용어가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G값’이라고 일컫는 지반진동가속도며 안전폐쇄지진(SSE, Safe Shutdown Earthquake), 가동기준지진(OBE, Operating Basis Earthquake), 쓰나미. 부끄럽게도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고 번역을 했다. 쓰나미라는 말은 이제는 여러 사람이 알아듣지만 그때만 해도 학계에서조차 생소한 용어였고, 그래서 연구소를 떠날 때까지 내내 지진해일이라고 번역을 했다. 그렇기는 했어도 그러는 동안 상당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나라 지진기록은 인천관측소에서 지진계를 설치하여 지진을 측정하기 시작한 1905년 이후 기록을 계기지진(instrumental earthquake), 그 이전에 발생한 지진을 역사지진(historical earthquake)으로 구분한다. 역사지진은 우리나라 모든 역사서에 언급된 지진관련 기록을 취합해서 관련 학자들이 각 지진의 규모를 평가한 자료인데, 과학기술처가 이를 주관했고 1980년도에 발간된 것으로 기억한다.
내진설계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지진과 계기지진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 같은 크기로 같은 장소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 이 지진의 여파가 특정 원전지점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원전 구조물이 이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이에는 매우 복잡한 조건과 이론이 동원되고 전문적인 조사와 평가과정을 거친다. 이때 내진설계의 기준이 되는 것이 지반진동가속도 ‘G값’이다. 현재 운전 중인 원전이 24기인데, 이 중 2016년 운전을 시작한 신고리3호기부터 지반진동가속도를 0.3G로 적용했고 그 이전에 건설된 23기는 모두 0.2G를 적용했다. 0.2G는 원자로 아래 10km 지점에서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원자로가 견딜 수 있는 값이고, 0.3G는 같은 위치에서 규모 7.0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견딜 수 있는 값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지진의 최대 규모는 5.8인 것으로 알고 있다. (재확인이 필요함)
내진설계는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현상을 예측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예측이 불가능하니 좀 더 안전한 쪽으로 평가를 하면 좋기는 하겠지만, 어느 정도까지 여유를 두어야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런 저런 조건을 다 따져서 만들어 낸 기준이 “지금까지 일어난 지진 중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 같은 자리에 다시 일어난다”고 가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가정으로 평가하는 과정에서도 요소요소에 상당한 안전율을 적용하고 있기도 하고. 그 이상 어떻게 더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 낼 수 있겠나. 이런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원전이 적어도 인간으로서 지진에 대비할 수 있는 최대치를 적용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내진설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원전 구조물의 안전성과 관련해서 내진설계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이 활성단층의 존재이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 별도의 글로 다시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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