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영석] 원자력 기술탑이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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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죽겠습니다.”

핵물리학자 서경수 박사의 각오다. 1983년 2월 서 박사는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 세 다발을 들고 캐나다로 향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투입할 국산 핵연료의 성능 시험을 위해서다. 핵연료 제조는 기초 중 기초 기술이었기에 성능 시험 여부에 국산화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1년여 뒤 서 박사는 “태평양에 빠져죽을 기회를 잃어버렸다”며 낭보를 전해왔다. 안타깝게도 서 박사는 4년 뒤 과로와 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서 박사와 같은 원자력 영웅들이 계속 나오면서 우리나라는 지금 원전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다. 프랑스, 미국, 일본, 러시아와 함께 원전의 생애 주기 전체에 걸쳐 독자 기술을 보유한 나라다.

이처럼 국산화의 중심이 됐던 월성 원전 1호기가 가동을 멈춘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방선거로 어수선하던 지난 6월 15일 비밀리에 이사회를 열어 조기 폐쇄를 의결했다. 앞서 정부는 5600억원이나 들여 노후설비를 바꿨다. 그런데 멀쩡한 원전을 4년씩이나 앞당겨 폐쇄키로 한 것이다. 폐쇄 이유로 내세운 경제성은 옹색하다. 지난해 가동률이 40.6%, 최근 3년 평균이 57.6%여서 수익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동률이 떨어진 건 정부가 정비를 이유로 지난해 5월부터 가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탈원전 소동이 없었던 2015년 가동률은 95.8%였다. 상업 운전 시작 후 35년 평균은 78.3%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탈원전을 선언했다. 1년여가 흐른 지금 부작용은 쌓여가고 있다. 한때 90%였던 원전 가동률은 50∼60%를 맴돌고 있다. 단가가 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비중은 높아졌다. 신재생 에너지 지원 보조금만 지난해 2조원을 넘었다. 안정적인 흑자를 기록했던 에너지 공기업의 빚은 급속히 늘고 있다. 전기 요금 인상은 없다고 쉬쉬하고 있지만, 국민 부담으로 돌아올 게 뻔하다. 탈원전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원자력 기술 인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선 2학기 원자력 분야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서울대도 지난해 후기 박사 모집에서 5명을 뽑으려 했지만 지원자는 1명이었다. 다른 대학에서도 재학생 이탈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국내 유일 원자력 고등학교인 한국원자력마이스터고는 전공과목에서 원자력이란 단어를 지웠다. 원전 24기를 독점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조차 사명에서 ‘원자력’을 빼는 것을 검토한다니 할 말이 없다.

600여개의 중소기업으로 구성된 기자재 공급업체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2년 이내 줄도산할 것이라는 공포심이 확산되고 있다. 기술자들은 해외 또는 다른 분야로 빠져나가고, 수주 물량은 급감하고 있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정부 눈 밖에 날까 아프다는 소리조차 못하고 있다. 40년간 쌓아온 원자력 기술탑이 무너지고 있다.

정부 대책은 모순 덩어리다. 한수원은 원자력 전공자 채용 비중을 13%에서 30%로 확대키로 했다. 원전은 짓지 않으면서 전공자는 더 뽑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원전 수출을 통해 업계를 키우겠다는 발상은 더욱 기가 차다. 국내선 위험하다며 포기한 원전을 수출하겠다는 것은 수출 대상 국가 국민을 우롱하는 기만행위다. 신재생에너지로 제시된 태양광 발전은 대형 산림 파괴를 유발하고, LNG는 초미세먼지를 가장 많이 배출하고 있다.

탈원전이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다. 탈원전은 대선 공약이다. 다듬어지지 않았다. 현실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는 노력을 첨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던 이명박정부의 4대강 사업과 박근혜정부 창조경제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국가적 장기 에너지 프로젝트를 5년짜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다. 과학적 재검토와 충분한 논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 결정돼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공약 도그마에서 한시바삐 빠져나오지 못하면 에너지 강국에 지배당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영석 논설위원 y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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