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척’ ESG경영, 정치색에 역풍 맞다... 유럽선 “녹색 파시즘”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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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2.18. 오후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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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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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도입 20년… 대전환기 맞은 ESG

그래픽=김의균·Midjourney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세계 4대 회계·경영 컨설팅사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지난달 미국 내 사무소들의 인턴십·장학금 관련 흑인 우대 정책을 폐기했다. 미국의 가난한 백인 학생들에게도 인턴십과 장학금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PwC가 흑인 우대 정책 폐기를 발표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마틴 루서 킹 주니어(미국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1929~1968) 기념일(1월 15일) 직전 주말이었다.

환경(Environmental)과 사회(Social), 지배 구조(Governance) 등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 기업의 장기적인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된다는 취지의 ‘ESG 경영’ 일환으로 인종 다양성 목표를 추구해 온 이 회사는 “(가난한 백인을 포함해 다양성 목표에) 엄격함을 적용하기로 했다”고 했다.

ESG의 큰 축인 ‘E(환경)’도 도전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발(發) 에너지 위기에도 값비싼 재생에너지 설비 조기 도입을 요구하는 환경 이데올로기에 ‘녹색 파시즘’이라며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유럽에서 일고 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의 돈줄을 쥔 자산운용사와 연기금의 추상같은 ESG 투자 원칙 아래서 담배·도박 기업과 함께 죄악주(罪惡株)로 치부되던 방산 기업들은 ‘두 개의 전쟁’ 국면이 이어지면서 “안보 없이는 지속 가능성도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기를 든다.

올해 딱 20주년을 맞은 ESG 경영이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 무조건적인 ‘ESG 숭배’가 저물고 있고, ‘ESG 2.0′ ‘ESG의 종언’ 같은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2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WEEKLY BIZ가 영원할 것 같던 ESG 위세를 흔든 파고를 분석했다.

그래픽=김하경

정치색에 찌든 ESG

ESG는 2004년 6월 유엔 글로벌 콤팩트(UNGC)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한 3대 요소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앞서 윤리 경영, 사회적 책임 경영(CSR) 등 20세기 경영 철학은 ‘착한 기업이 비난받지 않는다’는 데 방점을 뒀다. 이와 비교해 ESG 경영은 탄소 감축과 다양성 정책, 투명한 지배 구조 공시 등 비(非)재무적 요소를 중시하면 ‘숨겨진 수익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골자다. 20년 전 UNGC 보고서 제목이 ‘(사회적 가치에) 관심 갖는 자가 이긴다(Who Cares Win)’였던 이유다.

그러나 ESG는 이후 정치색에 물들며 탁해졌다. ESG 열풍에 올라탄 진보 환경 운동 진영이 탈화석을 정치 무기화하자, 대선을 앞둔 미국에선 그 반작용으로 안티(Anti·反) ESG기조가 불거졌다. 화석연료 산업 비율이 높은 지역의 표심이 두터운 공화당은 그린워싱(친환경적이지 않으면서 친환경처럼 보이게 하는 것) 논란, 저조한 투자 수익률 등을 근거로 ESG 회의론에 불을 지폈고,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반격하는 모양새다.

ESG 가운데 ‘S(사회적 책무)’의 핵심 개념인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운동도 정치 쟁점화된 지 오래다. DEI는 2020년 5월 백인 경찰관에 의한 미국의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이후 이어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캠페인을 계기로 ESG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입학과 고용에서 소수 인종을 우대한다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에 위헌 판결을 내리며 수술대에 올랐다. PwC는 물론 화이자(제약사)와 모리슨 포스터(법무법인) 등 미국 기업들이 회사의 흑인 우대 제도를 손봤다고 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업들이 DEI보다 ROI(투자 수익률)를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며 “너무 정치화된 DEI 대신 진정한 다양성에 주목하겠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주 공무원이 ESG 활동에 공적 자금을 투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데일리메일 캡처

빅테크 품은 ‘기후 진영’

ESG를 강력한 지구촌 규범으로 끌어올린 것은 ‘E(환경)’이다. ESG는 1987년 유엔의 ‘지속 가능한 발전’ 선언을 시작으로 지구온난화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의 합의가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20년 전 이미 공식화됐다. 이후 2014년 ‘기후 그룹(The Climate Group)’이라는 영국 주도의 글로벌 비영리단체가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에서 충당하자는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 캠페인을 시작한다. 문정빈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CSR, 지속 가능 경영 개념이 ESG로 대중화되면서 사회운동 차원이었던 친환경·기후 진영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됐다”고 했다.

이후 전통적인 기후 진영이 주도하는 RE100에 애플·구글 등 글로벌 공급망의 정점에 있는 빅테크가 대거 가입, 수출 기업들에 ESG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 됐다. 고승연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을 수출하는 기업들은 빅테크의 ‘ESG 납품 기준’이라는 새로운 무역 장벽에 맞춰 전체 사용 전력 대비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이는 ‘충성 경쟁’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빅테크들이 RE100을 선도한 이유와 관련, 배용만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굴뚝 산업과 거리가 먼 빅테크들은 전력 사용량이 상대적으로 적어 RE100 이행 비용이 낮았던 반면, 글로벌 선도 기업 이미지 강화 등 ESG 선도에 따른 이익은 많다고 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급망 사슬의 ‘갑(甲)’인 빅테크는 ‘가성비’를 이유로 이 세계에 발을 들였고, 빅테크를 품은 전통적 기후 진영은 새로운 공급망 질서에서 ‘수퍼 갑’이 된 것이다. ESG가 한동안 선악(善惡)의 이분법 구도를 보인 것도 경영학 차원의 ESG에 기후 운동으로서의 ESG가 가세한 결과다. 대표적인 분야가 방산과 원전이다.

방산株 논란

ESG 유행 이후 방산주는 오랜 기간 ‘죄악 주식(sin stocks)’ 논란에 시달려왔다. 탱크·전투기·군함 등은 주로 휘발유·경유 등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E(환경) 지표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웠다. 또 인명 살상 무기를 만드는 방산업체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S(사회적 책무) 지표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낙제를 면하기 어려웠다. 2021년 유럽연합(EU)은 ESG 분류 체계 초안에서 방위 산업을 담배 산업과 함께 투자 부적격 대상인 ‘유해 산업’으로 묶었다.

하지만 2022년 2월 말 이라크 전쟁 이후 20여 년 만의 전면전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기류는 바뀌었다. 그해 1월부터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2월 중순 스웨덴 방산업체 사브 미카엘 요한슨 최고경영자(CEO)는 FT 인터뷰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ESG 포트폴리오에서 방산을 빼지 말아달라고 전 세계 자산운용사·연기금 등에 호소했다. 고등훈련기 M346 등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방산업체 레오나르도의 알레산드로 프로푸모 CEO도 EU 의회에 “안보 없이는 지속 가능성도 없고, 방위 산업 없이는 안보도 없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ESG가 환경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공동체의 안녕을 까먹었다” “국방은 윤리적이다” 등 방산주 옹호론이 이어졌다.

“방산주 투자에는 문제가 없지만, ESG 투자라는 미명하에 이뤄져선 안 된다”는 반대론이 맞섰지만, 덴마크 사학 연금 ‘아카데미커펜션’이 핵무기와 집속탄(集束彈)처럼 심각한 민간인 피해 우려가 있는 일부 무기 관련 기업을 제외하고는 방산주에 투자하겠다고 밝히는 등 ‘머니 무브’가 본격화됐다. 글로벌 펀드 평가사 모닝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항공우주·방산’ 주식을 한 주 이상 보유한 ESG 펀드는 1238개로, 1년 전 대비 25% 증가했다. 전쟁발 머니 무브 영향으로 방산주는 다시 뜨는 추세다. 지난 1일 스톡홀롬 증권거래소에서 사브는 724.2크로나(약 9만2300원)에 거래를 마쳤다. 1주당 가격이 2년 전의 2.5배로 뛴 것이다.

지난해 7월 4일 스웨덴 공군의 사브 JAS 39 그리펜 전투기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 상공을 비행하는 미디어 행사를 하고 있다. /로이터

‘뜨거운 감자’ 원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탄소 감축을 골자로 하는 재생에너지 이슈도 불붙는 양상이다. 특히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았던 독일은 전쟁 후 전기료가 전쟁 직전 5년 평균 수준의 14배까지 폭등했다. 성급한 탈원전을 고집했던 집권 사회민주당·녹색당 내각에 대한 ‘녹색 파시즘’ 논란이 번진 이유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일찌감치 탈원전에 나선 독일은 2022년 말이었던 원전 완전 가동 중단 시점을 부랴부랴 이듬해 4월로 늦췄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환경 우선주의에 대한 열정이 지갑을 위협하는 순간 (국가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낮은 수준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지 드러냈다”고 전했다. 독일 등이 탈원전을 고집한 이유는 사용 후 핵폐기물 안정성 우려를 이유로 원전을 반환경 에너지원으로 봤기 때문이다. RE100이 주도하는 환경 진영도 원전을 반ESG 에너지로 본다.

반면 원전이 무(無)탄소 전력원이라는 점에서 원전을 친ESG로 분류하는 국가들도 늘고 있다. 프랑스·스웨덴·이탈리아 등은 지난해 탈원전 정책을 폐기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탈원전을 추진해 온 일본도 지난해 2월 ‘원전의 적극적 활용’으로 방향을 틀었다. EU 의회는 이미 2022년 7월 ESG 투자 기준인 EU 택소노미(분류 체계)에 원전 투자를 허용하기로 결의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탄소 배출 없는 ‘무공해 전력’에 원전을 명시했다.

그래픽=김하경

‘착한 척’ ESG 그만

침략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방어용 무기를 만들거나 자국 에너지 사정에 따라 원전을 가동해도 눈총을 받았던 ‘ESG 광풍’은 어느 정도 진정되는 분위기다. 백화점식 ESG 압박에 기업들은 물론이고 투자사들도 피로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알렉스 에드먼스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지난해 ‘ESG의 종언’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생산성, 자본 배분 전략보다 ESG를 향한 의지를 더 보여주기 위해 기업, 투자자들이 스스로를 넘어뜨려왔다”고 지적했다.

일부 자산운용사가 ESG 요소를 아예 따지지 않은 ‘ESG 중립 펀드’를 잇따라 내놓는 등 친(親)ESG 펀드의 유행도 식고 있다. 대표적인 ESG 중립 펀드는 지난달 공화당 경선 후보에서 사퇴한 인도계 미국인 억만장자 비벡 라마스와미의 ‘스트라이브에셋매니지먼트’가 2022년 9월 출시한 ‘더 스트라이브 500 ETF(상장지수펀드)’다. 보유액 순으로 MS·애플·엔비디아·아마존·메타 주식을 가장 많이 담은 이 ETF의 지난 1년간 수익률은 25.7%로 미국 뉴욕증시의 대표 주가지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의 같은 기간 상승률(24.8%)을 조금 웃돌았다. 반면 블랙록의 ESG 펀드인 ‘아이셰어스 미국 에너지 ETF’는 이 기간 수익률이 –1.5%였다. ‘인베스코 ESG 나스닥 100 ETF’의 경우 지난 1년 수익률이 47.5%에 달해 ‘ESG 펀드’의 자부심을 지켰다는 평가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ESG 펀드의 성적표를 종합해 보면, ‘ESG 펀드’의 개념이 모호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부분의 글로벌 상장 기업이 ESG를 강화하고 있어 ‘ESG 펀드’와 ‘ESG 중립 펀드’의 차별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주 중심 나스닥에 우선 투자하는 ‘인베스코 ESG 나스닥 100 ETF’의 보유액 상위 5종목은 MS·애플·엔비디아·브로드컴·아마존이다. 5종목 중 4개가 라와스와미 ETF와 겹친다. 에드먼스 교수는 “ESG는 중요하다. 다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ESG 개념은 이어질 것

ESG에 대한 숭배가 흔들리며 관련 투자도 감소세다. 글로벌지속가능투자연합의 2년 단위 집계에 따르면, 2012년 13조3000억달러에서 2020년 35조3000억달러까지 치솟았던 지속 가능(ESG) 투자 규모는 2022년 30조3000억달러로 2년 전 대비 5조달러(14.2%) 감소했다.

9조달러(약 1경2000조원) 이상의 자산을 굴리는 세계 1위 자산운용사인 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도 지난해 6월 전 세계 명사들의 강연 축제인 아스펜 아이디어 페스티벌에서 “ESG란 용어를 더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ESG가 한물갔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2020년 1월 연례 서한에서는 “화석연료 기업 투자를 중단하고 ESG를 투자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밝히며 ‘ESG 투자 전도사’로 통했다. 그런 핑크 회장마저 발을 뺐다는 것이다.

하지만 ESG란 용어의 유행이 식더라도 그 개념 자체는 이어질 것이란 전문가 해석도 이어진다. 문 교수는 ESG에 대한 핑크의 입장은 달라진 게 없다며 “핑크가 ESG 언급을 피하는 이유는 그 개념이 기업들에 충분히 확산됐고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G(지배 구조)’는 이제 시작이라고 배 변호사는 전했다. 공급망 관리나 자금 조달을 좌우할 수 있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등의 의무 공시가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본격화하기 때문이다.

그래픽=김하경

☞ESG

환경(Environmental)·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조합한 말로, 2004년 6월 유엔 글로벌 콤팩트(UNGC)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친환경 에너지 확대(E), 인종·성별 다양성 추구(S), 투명한 경영 공시(G) 등 ESG 경영을 하면 기업들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초과 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는 논리다.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2020년 ESG 기업에 주로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ESG 경영이 급물살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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