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 일본 에너지 정책과 정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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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일본에서 3월 22일이 ‘일본의 몰락이 시작한 날’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자극적 기사가 등장했다. 기사의 배경에는 경제산업성이 22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도호쿠(東北) 지역에 발령한 ‘전력수급 위기경보’가 존재한다. 위기경보에 따라 하루 종일 가정과 기업에 절전을 요청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며, 절전을 위해 상점가에서는 간판 전등을 켜지 않거나 철도회사가 통근 전철의 운전을 중지하기도 했다.

전력수급 위기경보가 발령된 이유는 앞서 16일 도호쿠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화력발전소가 정지돼 평소보다 전력공급이 줄어든 상황에서 악천후로 인해 태양광을 가동할 수 없었고, 도쿄의 기온이 저하해 난방에 필요한 전력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경보는 2011년 3월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원전 가동이 중단되면서 전력 부족 문제에 직면한 당시 민주당 정권이 정비한 제도였지만 실제 발령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일본인 모두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다만 일본에서 전력수급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탈탄소사회를 목표로 태양광 등 재생가능에너지 도입을 추진하는 한편 노후화한 석유나 석탄 등의 화력발전소를 연이어 가동 중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력 부족은 상존하는 문제다. 지난해 1월에는 관서지방에서도 연료 부족으로 전력수급이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원전을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관동지방에서는 여름이나 겨울의 최대 전력수요기를 중심으로 심각한 전력 부족 상황이 일상화하고 있다.

이런 전력 부족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최악의 원전 사고 중 하나로 꼽히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이 탈원전으로 에너지정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력수급 위기경보 발령을 계기로 원전 추진에 대한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기후변동 대책, 전력의 안정적 공급, 에너지 자급 등을 이유로 원전 이용을 촉구하는 발언이 정계나 경제계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일본의 에너지정책이 흔들리고 있는 원인을 제공한 책임이 정치에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첫째로 에너지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지 못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다음 해인 2012년 민주당 정권은 ‘2030년대에 원전 제로’를 목표한 탈원전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직후 정권에 복귀한 자민당 정권에서는 원전 활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방향 전환을 했음에도 아베 정권 이후 기시다 정권에 이르기까지 자민당 정권은 안정적 전력수급을 위해 필요한 원전의 신설이나 개축에 대한 정책적 판단은 유보했다.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노후화한 원전을 가동할 수 없다면 원전 신설이나 개축이 필요했지만 탈원전에 대한 국민 지지가 여전했기 때문에 이를 방치한 것이다. 그 결과 현재의 전력수급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자민당을 포함한 정치권이 에너지정책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구체적인 방안을 국민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탈탄소 사회를 위해 일본이 재생가능에너지와 원전으로 밸런스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재생가능에너지에 의존할 것인가. 선택은 전력 소비자이자 유권자인 일본 국민이 해야 한다. 그러나 자민당도 야당도 국민이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선거에서 국민이 스스로 에너지정책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원전 사고 후 10년이 흘렀음에도 일본의 에너지정책이 향하고 있는 미래를 일본 국민이 예상하기 어렵다면 일본의 정치권이 자신들의 책무를 포기한 결과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훈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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