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택소노미가 정한 방사성 폐기물 계획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아직 나온 바가 없다. 다만 전 세계 환경 정책을 주도하는 EU가 원전의 방사선 폐기물 처리를 택소노미 조건으로 부여한 만큼, 앞으로 원전 가동에 있어 폐기물 처리 시설 확보가 필수 조건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임시 저장시설에 고준위 폐기물을 저장하다 보니 안전성 우려도 크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저장시설 용량이 빠르면 2031년부터 순차적으로 다 찬다는 점이다. 원자력진흥위원회는 오는 2031년에는 고리·한빛 원전, 이듬해인 3032년에는 한울 원전의 저장시설이 모두 찰 것으로 예상했다. 원전을 가동할 때마다 방사성 폐기물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추가 저장시설이 없다면 원전을 가동을 멈춰야 한다.
그나마도 정부가 정한 시간표는 아주 낙관적인 상황을 전제한 것이다. 부지 선정을 놓고 지역 주민 간의 갈등이 일어나면 시간은 더 늦어질 수 있다. 실제 최근 방사성 폐기물 영구 처리 시설 건설 계획을 확정한 스웨덴도 1992년부터 부지확보에 착수해 30년이 걸렸다. 부지를 정하고 2016년부터 건설에 들어간 핀란드는 39년 전인 1983년부터 부지확보에 나섰다.
주민 반발이 심한만큼 방사성 폐기물 처리 시설 건립을 위해서는 특히 정부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을 주장한 문재인 정부는 정작 탈원전에서 가장 중요한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건립 문제에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정부는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6년 7월 이미 ‘1차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계획안이 확정됐기 때문에 다음 정부는 부지 선정 등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책 추진을 이유로 해당 계획을 돌연 재검토했다. 약 4년간의 재검토 과정을 거친 뒤 정부는 지난해 12월에 ‘2차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다시 마련했다. 그동안 부지 선정 등 핵심 문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노동석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은 “이번에 확정한 2차 계획안을 보면 이전 정부가 만든 1차 계획안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면서 “탈원전을 하든 안 하든 폐기물 처리장은 반드시 지어야 하는데, 정부가 여론 눈치에 일부러 이를 방치한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