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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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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녹색 분류체계' 구축 서두를 일 아니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1.11.07 10:10

노동석 서울대학교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



노동석 위원

▲노동석 서울대학교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

바둑 용어에 ‘무리수’와 ‘자충수’가 있다. 무리수는 과욕을 부려 정도를 벗어난 수, 자충수는 자신이 둔 수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수를 말한다. 2050 탄소중립시나리오,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상향안,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및 적용 가이드(안) 등 줄지어 발표된 에너지관련 정책을 보다 문득 이 바둑용어들이 떠올랐다. 탄소중립안이야 선언적인 의미가 강하므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제적으로 ‘후퇴금지(no backsliding)’가 엄격히 적용되는 NDC에 이어 ‘한국형 녹색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 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무리수, 자충수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영국 글래스고에서 최근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우리는 "2030 NDC를 상향하여 2018년 대비 40% 이상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장 국가 체면을 높이는데는 도움이 됐을 지 모르지만 실현 가능성이 극히 불투명한 어려운 숙제를 떠맡겠다고 자청한 셈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파급영향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더 걱정을 키우는 것은 정부가 NDC 상향안 발표에 이어 ‘한국형 녹색분류체계’라는 또하나의 ’깜놀‘ 에너지정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20일 환경부는 ’한국형 녹색분류체계‘를 관계 기관에 배포했다. 연말까지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녹색분류체계가 필요한 이유는 녹색 경제활동에 대한 명확한 원칙과 기준을 정하여 그린워싱을 막으려는 것이다. 환경적 측면에서 상품의 표시·광고를 허위 또는 과장하여 친환경 이미지만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이 그린워싱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유럽연합(EU) 등 몇몇 국가들은 그린 택소노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도입을 검토 중이다. 사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일 세계가 공인하는 그린 택소노미가 실제로 채택된다면 이보다 더 무서운 법은 없을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녹색분류체계는 녹색금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녹색분류체계에 포함되면 더 많은 자금이 녹색 프로젝트나 녹색기술에 지원되는 반면 포함되지 않은 기술은 자금조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금융이 막혔을 때 기업이 얼마나 막막한 상황에 처할 지는 정부가 단행한 강력한 부동산 대출규제의 파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환경부의 녹색 분류체계에서 발전·에너지분야에는 17개의 활동(기술)이 포함돼 있다. 주로 재생에너지, 바이오, 수소, 암모니아, 에너지 저장, ICT 기반 에너지관리 등이다. 언론은 다수의 화석연료 사업(열병합 발전 등)이 대거 포함되어 문제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부 화석연료 기술의 그린워싱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산업계와 환경단체는 LNG 발전을 2030년까지 한시적으로 포함한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 업계는 막대한 좌초비용이 발생할 수 있는 시한부 사형선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환경단체는 다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LNG 발전이 친환경 기술로 둔갑됐다며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논란은 원자력 분야다. 예상대로 원자력, 원자력-수소, 소형모듈원자로(SMR)를 포함한 원자력 신기술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원자력이 그린 분류체계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 건설비, 연구비, 수출금융 등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진다. 다만 수출용 혁신형 SMR(i-SMR)이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사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추가로 전해졌다. 업계는 예타 통과를 낙관한다. 혹시 녹색분류체계 확정 전에 i-SMR 예타를 통과시키려는 정부의 얕은 꾀는 아닌지 모를 일이다.

EU의 경우 원자력의 그린 택소노미 포함 여부를 놓고 역내 국가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프랑스 등 10개국은 포함을, 독일 등 5개 회원국은 불포함을 주장한다. EU는 EU 공동연구센터(JRC)에 검토를 요청했다. JRC는 "원자력이 다른 발전기술 보다 인류의 건강과 환경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EU는 유럽원자력공동체와 환경위험과학위원회(SCHEER)에 재검토를 요청했다. 두 기관은 JRC의 전반적 내용을 지지했지만 SCHEER는 "일부 불완전하고 추가 증거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갑론을박이 진행되는 가운데 EU의 결정은 상당기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우리가 EU를 추월할 것 같다.

녹색분류체계는 국제사회의 요구사항이 아니다. 시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우리가 굳이 앞장서 나설 필요도, 실익도 없다. 다른 국가들이 우리의 결정을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충분히 알리고 논의해야 한다. 임기 말에 졸속으로 대못을 박는 것은 무리수이자 자충수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 정부가 판단할 것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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