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의 뉴스 읽기] 환경 감시자에서 권력자로… 에너지 기관 장악한 '환·녹·정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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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호 논설위원이 본 환경단체, 그들의 변신]
환경 관련 36곳 기관장·임원 보니… 절반 넘는 19곳에 24명 진입
원안위 월성1호기 심의때 소송 당사자가 의결… 관련법 위반 논란


박은호 논설위원

환경 단체들이 낸 4대강 사업 반대 소송 결심 공판이 열린 2010년 부산지법의 한 법정. 환경운동연합 환경법률센터 소속 정남순 변호사가 감정이 복받친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변론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 자리에는 환경연합에서 활동하던 김좌관 부산가톨릭대 교수, 박창근 관동대 교수,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등이 원고 측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들은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선 인물들이다.

환경 단체들은 대법원까지 간 4대강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안 소장은 작년까지 환경부 차관을 지냈고, 김 교수는 문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환경에너지팀장을 지낸 데 이어 작년 4월 한국전력공사 비상임이사로 선임됐다. 박 교수는 원자력안전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수자원공사를 4대강 소송 법정에 세운 정 변호사는 수자원공사와 환경산업기술진흥원 두 곳에서 비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 등을 상대로 현장에서 감시 활동을 벌이던 환경 운동가들이 정부 기구 내부로 대거 진입〈그래픽〉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환경부 장차관과 청와대 기후환경비서관 자리를 차지한 데 이어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무조정실,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의 기관장이나 이사, 감사 등 임원 자리에 줄줄이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인 알리오(ALIO)에 등록된 정부 37개 부처·청·위원회에 소속된 360개 공공기관 중 환경·원자력·에너지 관련 36개 기관의 임원 정보를 분석해 보니 절반이 넘는 19개 기관에 탈핵·환경 운동을 벌인 인사 24명이 진출해 있었다.


환경 단체 대표 출신인 조명래 환경부 장관과 김혜애 기후환경비서관, 김호철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 등 정부 부처까지 합하면 30명에 육박한다. 특히 환경연합 사무총장 출신들이 약진했다. 노무현 정부 때 환경부 장관을 하더니 문재인 정부에선 차관을 배출하고, 공공기관 두 곳의 기관장이 됐다.

이 공공기관들의 상임이사, 기관장 등은 억대 연봉과 함께 연간 수천만원 업무추진비를 별도로 쓴다. 비상임이사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열리는 이사회 참석 수당으로 연간 많게는 3000만원까지 받는다. 정부 관계자는 "과거 경제적으로 쪼들리기 일쑤였던 환경 운동가 다수가 상당 수준 월급·활동비를 받고 쉽게 공개 안 되는 정보에 접할 수 있는 자리로 간 것"이라며 "환경 단체의 상전벽해"라고 했다. 김병기 한수원 노조 위원장은 "환경 단체가 권력을 감시하는 본연의 역할을 버렸다는 것이 본질"이라며 "과거 환경 단체들이 원자력 전문가들을 '핵 마피아'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자신들이 '환경 마피아'라는 소리를 듣게 될 수 있다"고 했다.

◇25년 축적한 원자력 관련 자료 몽땅 지워졌다

환경 단체 출신들의 공공기관 진출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관련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이들도 상당수 있고, 비판적 시각으로 내부 감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비정부기구(NGO)인 환경 단체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자마자 한꺼번에 정부와 공공기관 내부로 물밀듯 들어가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우리만의 현상이라는 말도 나온다.

일부 공공기관에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벌어지고 있다. 1992년 설립된 원자력문화재단은 현 정부 들어 에너지정보문화재단으로 이름과 기능을 바꿨다. 원자력만 아니라 태양광·풍력 등 에너지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홍보 활동 등을 하는 기구다.

그런데 과거 25년간 구축한 방대한 원자력 관련 문서와 자료 등이 작년부터 이 재단 홈페이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 재단 예산은 국민과 기업들이 내는 전기료의 3.7%를 떼 내 적립하는 전력기반기금에서 나온다.

이에 대해 재단 관계자는 "과거 자료를 인터넷에서 서비스하려면 서버 구축비 등으로 연간 1000만원 예산이 든다. 예산 부족으로 (삭제) 결정을 한 것"이라고 했다. 한 해 50억원 넘는 예산을 쓰면서도 1000만원 예산이 없다는 것이다. 원자력 업계 관계자는 "과거 원자력문화재단은 원자력을 미화한다며 환경 단체들이 눈엣가시로 여겼던 기관"이라며 "자료를 없앤 것은 일종의 보복 아니냐"고 했다.

◇원전 기관 장악한 탈핵 인사들

탈핵 운동가들이 원전 관련 기관에서 의사 결정에 부적절하게 참여했다는 비판도 있다. 환경연합 환경법률센터 이사장인 김호철 원안위원은 원안위를 상대로 월성 1호기 관련 소송을 냈다가 작년 2월 원안위 위원으로 자리를 옮기기 사흘 전에 소송 대리인단에서 탈퇴했다. 그런데 원안위 회의록에는 김 위원이 작년 9월 원안위 위원 자격으로 월성 1호기 정기 검사 승인 안건을 의결한 것으로 돼 있다. 이런 경우 스스로 의사 결정에서 빠지거나 제척하도록 규정한 원안위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원안위 3개 산하기관과 한수원에도 탈핵·환경 단체 인사들이 다수 진출한 상태다. 특히 원자력안전재단에는 이사장과 이사, 감사 등 세 자리를 탈핵 운동 인사들이 동시에 꿰찼다.

탈핵 운동가로 한수원 이사가 된 김해창 경성대 교수는 작년 6월 한수원 이사회에 참석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에 찬성표를 던졌다.

한수원 노조 측은 "7000억원 들여 보수한 월성 1호기는 당초 2022년까지 가동될 예정이었다"면서 "김 이사를 비롯해 한수원에 손해를 끼친 결정을 내린 이사들을 배임죄 등으로 고발한 상태"라고 했다.

해외 환경운동가들 "기후변화 막으려면 원전만이 녹색 해법"

국내 환경단체는 원전이 마치 절대 악인 것처럼 공격한다. 조금이라도 원전을 옹호하면 "진정한 환경 운동가가 아니다"라는 신념에 빠져 있는 운동가들도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보면 오히려 원전 확대를 주장하거나 원전 반대에서 친(親)원전으로 돌아선 환경 전문가, 환경 운동가들이 드물지 않다.

저명한 과학자와 환경 운동가 18명이 2015년 발표한 '에코모더니스트 성명서'엔 '지구 카탈로그'라는 잡지 발행인으로 유명한 스튜어트 브랜드도 이름을 올렸다. 미래 학자이자 환경 운동가인 그는 기후변화 방지 등을 위해선 원전을 폐쇄할 게 아니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988년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미국 의회에서 처음 증언한 나사(NASA) 출신 과학자 제임스 핸슨은 "기후변화 위험에 대처하려면 원전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지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재생에너지만으로는 기후변화를 막기 역부족"이라며 원자력만이 유일한 '녹색 해법'이라고 했다.

그린피스의 내로라하는 활동가였던 패트릭 무어는 환경주의자들의 원전 반대 주장이 "과학이 아닌 신념"이라고 비판하며 친원전 운동가로 변신한 경우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 게이츠도 2006년 '싸고, 안전하고, 환경친화적인 차세대 원전' 개발에 뛰어들었다. 기후변화라는 지구 차원의 위기에 대처하려면 원자력발전이 필수라는 것이다.

[박은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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