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100 실현이 원전 포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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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22일 경남 창원 경남도청에서 ‘다시 뛰는 원전산업, 활력 넘치는 창원·경남’을 주제로 열린 열네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반도체 장비 생산으로 전 세계 반도체 기업에 '슈퍼 을'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ASML이 '2040년 탈원전'을 선언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지난 정부의 비현실적인 탈원전 정책의 폐지를 선언한 윤석열 정부에 ASML이 엄중한 '경고장'을 날렸다는 것이다. 2040년까지 완전한 탈원전을 달성하지 못하면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꼭 필요한 ASML의 극자외선 노광(露光)장비를 납품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야단법석이다.

ASML의 '2040 탈원전'이라는 오보

ASML이 지난 2월 14일에 공개한 '2023 연차보고서'에 '2040년까지 탄소중립(net zero)을 달성하겠다'고 밝힌 것은 사실이다. 자사 생산시설에서는 태양광·풍력 등의 재생에너지를 이용해서 직접배출(scope 1)과 간접배출(scope 2)을 0으로 만들고, 자사의 장비를 사용하는 고객 기업(scope 3)에도 탄소 순(純)배출 0을 실현하도록 요구하겠다는 것이 ASML의 목표다.

그러나 ASML의 연차보고서에서는 '원자력'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355쪽의 연차보고서에는 원자력을 뜻하는 'nuclear'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산화탄소의 순배출을 줄이는 전 지구적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는 ASML이 '탄소중립'을 위해 가장 확실하게 검증된 '무(無)탄소 에너지(CFE·Crbon-Free Energy)인 '원자력'을 애써 거부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원자력은 EU의 '유럽형 녹색분류체계(EU 그린택소노미)'에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ASML의 '2040년 탈원전' 보도는 '탈원전'을 '탄소중립'의 수단으로 혼동한 명백한 오보였다.

지난 정부가 2017년부터 무차별적으로 밀어붙였던 '탈원전'은 동일본대지진에 이어서 발생한 지진해일(쓰나미)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국민적 공포를 겨냥한 정치공학적 선택이었다. '국민 안전'을 핑계로 한 '탈원전'과 환경보존을 명분으로 한 '탈석탄'을 결합한 것이 지난 정부의 망국적 '에너지 전환'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산업이 휘청거렸고, 가장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인 전력 수급체계가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탈원전·탈석탄의 대안으로 밀어붙였던 태양광·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확대는 엉뚱하게도 온실가스를 마구 내뿜는 LNG 발전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세계적 우량 공기업이었던 한전은 적자의 늪에 빠졌고, 전기요금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ASML은 RE100 회원사가 아니다

ASML이 연차보고서에서 '재생에너지(renewable)'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ASML이 2040년 탄소중립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RE100(재생에너지 100%)'을 고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ASML은 민간 캠페인인 RE100의 공식 회원사가 아니다.

지난 대선 후보의 토론회를 통해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RE100은 영국의 '더 클라이밋 그룹(TCG)'이라는 비영리 민간단체가 2014년에 전 세계의 대기업을 상대로 시작한 캠페인이다. 연간 500TWh의 전력을 소비하는 기업이 스스로 정한 기한 내에 100% 재생에너지 사용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하도록 요구한다.

현재 애플·구글·마이크로소프트·인텔 등 428개 기업이 RE100의 회원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 기업 중에는 골드 회원의 자격을 얻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를 비롯해 36개 기업이 RE100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의 표현으로 RE100 캠페인이 기업에 매력적인 선택일 수 있다. 대부분의 기업 활동을 전기에 의존하는 정보·통신·금융·서비스업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냉난방과 수송 등 제한된 영역의 에너지만 전기화하면 RE100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RE100 캠페인에 참여하는 기업의 부담은 만만치 않다. 스스로 태양광·풍력 설비를 갖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부지가 필요하고,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투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장 현실적인 LNG 발전은 온실가스를 쏟아내기 때문에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리튬이온 배터리를 이용한 ESS(에너지저장장치)도 여전히 설익은 미래 기술이다. 현재로는 재생에너지 사업자와의 전력구매계약(PPA)이 유일한 대안이다.

특히 연중무휴 하루 24시간 최고 품질의 전력공급이 필수인 반도체 기업의 경우 재생에너지의 심각한 간헐성 때문에 RE100은 비현실적인 꿈일 수밖에 없다. 발전단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재생에너지가 반도체 기업에 중요한 원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원전이 아니라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국가 차원에서의 RE100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RE100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국민 생활과 산업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모두 전기로 대체해야만 한다. 전력화의 비율이 20% 수준인 우리의 경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의 발전 설비를 5배 이상 늘려야 하고, 송배전에 필요한 기반 시설도 확대해야만 한다. 전기화가 불가능하거나 비현실적인 제철·시멘트·정유 산업은 통째로 포기해야만 한다.

무탄소에너지(CFE)도 훌륭한 대안

ASML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낮은 재생에너지 비율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재생에너지 비율이 2022년 기준으로 9%에 지나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반도체 산업에 적극적인 대만·중국·일본의 사정이 모두 비슷하다.

중위도 지역에 위치해서 일조량이 캘리포니아의 65%에 지나지 않고 바람의 품질도 충분하지 않고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의 경우 재생에너지는 이미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풍력 설비가 넘쳐나는 제주와 태양광 설비가 몰려있는 전남·경남에서는 계통 안정을 위해 재생에너지 설비의 출력을 강제로 제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탄소중립이 국제사회에서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거름이라도 지고 따라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사고의 위험성만으로 기술을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안전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합리적 선택이다.

우리에게는 'CFE 이니셔티브'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수밖에 없다. UN이 추진하는 지속가능목표(SDG)에 포함된 '연중무휴 무탄소에너지협약'(24/7 CF100)과도 어울리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RE100이라는 민간 캠페인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많이 늦었지만 국제사회에서의 CFE 설득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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