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정재훈 한수원 사장을 위한 변명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1.08.22 15:07

에너지경제 구동본 에너지환경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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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억울한 사람 많겠지만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도 그 중 하나일 것 같다. 2018년 4월 취임한 뒤 임기 3년은 물론 그 임기를 넘겨서까지 월성 원전 1호기의 조기폐쇄 문제로 시달리고 있어서다. 월성 1호기의 조기폐쇄는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상징이다. 그 걸 그가 불과 취임 두 달 만에 실행에 옮겼다. 한수원 이사회를 열어 최종 폐쇄 결정을 한 것이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는 검찰로부터 특정 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배임죄 및 업무방해죄로 기소돼 24일 첫 재판에 나선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그가 월성 1호기 경제성을 축소 조작했고 조작된 평가 결과로 한수원 이사회를 속여 월성 1호기를 조기 폐쇄함으로써 한수원에 1481억원 상당의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이 게 사실이라면 그 자체로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설령 그 혐의가 사실이라도 이 엄청난 일을 그가 자의적으로, 독자적으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 월성 1호기 폐쇄는 청와대의 설명대로 대통령 공약사항이고 정부의 주요 정책 과제로 선정돼 공개적으로 추진됐던 사안이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탈핵시대로 가겠다"며 "현재 수명을 연장해 가동 중인 월성 1호기는 전력 수급 상황을 고려해 가급적 빨리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설계 수명이 다한 원전 가동을 연장하는 것은 선박 운항 선령을 연장한 세월호와 같다"고까지 했다.

그 이후 약 4개월 뒤인 10월 24일 국무회의에선 월성1호기 조기폐쇄 등과 관련 정부의 에너지전환로드맵이 의결됐다. 이듬해 2월 20일엔 산업통상자원부가 산하 한수원에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관련 필요조치를 하라고 협조요청 문서를 보냈다.

그 해 4월 문미옥 당시 청와대 과학기술보조관의 월성 1호기 방문 결과 보고서가 청와대 내부 보고시스템에 올라오자 문 대통령은 "월성 1호기의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란 댓글을 달았고 이어서 청와대 참모와 산업부 관료 등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위해 긴박하게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두 달여 만인 6월 15일 한수원 이사회가 월성 1호기 조기폐쇄를 의결했다.

지금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면 문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관련 취임 후 한 달 여 만에 추진의지를 공식화했고 이어서 추진경과를 중간 점검·확인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 꼭 1년 만에 월성 1호기는 조기 폐쇄된 것이다.

대통령이 이렇게 관심 갖고 나서는 사안에 참모와 관료들이 제대로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문제다. 권력 누수이자 공직기강 해이이기 때문이다. 정재훈 사장도 그런 참모, 관료와 마찬가지였다. 비록 민간인 신분이지만 산업부 차관보까지 지낸 관료 출신이다. 한 마디로 일 처리의 프로란 의미다. 또 산업부의 감독을 받는 산하기관장이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천명했고 감독부처가 다그치며 사실상 지시한 사항을 외면하고 거부하기 곤란하다. 정 사장이 여러 차례 "정부 정책에 협조하는 게 공기업 역할"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 걸 에둘러 한 표현이다. 민간인 신분이면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공공기관에 조금이라도 몸 담아봤다면 그런 소리 못한다.

정 사장의 혐의를 자업자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가 한수원 사장을 맡지 않았다면 그 불행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 사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면 달라졌을까.

한 때 그가 "총대를 멨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 말은 그가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앞장섰다는 뜻이다. 또 이렇게 할 수 있는 분명한 동기가 있었다는 얘기다. 예컨대 가치나 보상 말이다. 하지만 그의 출신으로 보나 지금까지 드러난 걸로 보면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관료는 권력과 정책의 방향에 대체로 순응한다. 관료들이 스스로 자조 섞인 투로 하는 "영혼이 없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좀처럼 나서지 않고 상명하복 하도록 철저히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지향하는 가치가 같거나 보상이 뒤따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지는 정치인들과 다르다. 정권이 장·차관 자리를 약속했다면 솔깃했겠다. 그렇더라도 형사처벌 위기에 몰릴 무리수까지 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됐던 정 사장의 혐의는 이제 법원 심판대에 올랐다. 이 사안은 정책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절차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없지 않다. 대통령이 이 문제의 시발점이었으니 정리도 본인이 해야 한다. 일을 저질러놨으면 수습도 본인이 하는 게 마땅하다. 아랫사람이 설거지도 하고 책임까지 지라는 건 리더의 본분이 아니다. 늦었지만 이 시점에 나서서 적어도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는 사법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그게 문제라면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 있다"는 취지의 말이라도 내놓아야 한다. 이미 재판 대상이 됐는데 참모를 통해 "사법 판단 대상이 되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만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재판 과정에서 정 사장의 배임혐의 불법이 인정되면 그 배임의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불법을 지시·유도 또는 방조·묵인해 공기업 한수원의 손실을 초래하고 더 나아가 국민의 소중한 재산인 재정을 축내게 한다면 그게 대통령의 배임 책임이 아니고 뭔가.

에너지 전환이란 대선 공약은 국민들이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를 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문제 삼을 건 없다. 다만 절차상 불법이나 문제가 있었다면 그 정책 추진에 소요된 모든 예산을 국정수행 비용으로 얼버무릴 순 없다.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전환 과속에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가 마련됐다고 볼 수 없다. 그간 탈원전 갈등으로 그게 입증됐다. 공감대가 부족한 사안에 민주와 법치를 강조한 정권이 민주와 법치의 정신과 절차를 무시했다면 국정 농단과 다르지 않다. 이견·갈등·대립이 있는데 설득·절충·조정 없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그게 권력남용이고 독재다.

문재인 정부의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자신의 개인적 욕망에서든 소신에서든 정권 탄압을 받은 게 분명하다. 그들은 권력기관 수장답게 그 억울함을 대권 도전이라는 정치행위 등 적극적인 방식을 통해 풀려하고 있다. 반면 정 사장은 어떤가. 그저 피의자 신문으로 재판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다. 그것도 혼자 외롭게 싸워야 한다. 이 사안에 관련된 관료 등 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기름장어처럼 처신하거나 둘러댄다. 미꾸라지처럼 속속 빠져나가거나 꽁무니 빼고 달아난다. 정부 정책을 잘 따르면 보상은커녕 잘 지켜주고 보호해 줄 거라 믿었던 정권에 철저히 배신 또는 이용 당하는 모양새다. 회사에 배임한 게 아니라 정권에 배신당한 거다. 힘없고 백 없으면 자나깨나 몸조심해야 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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