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감성 결합 언어로 적극 맞불
광우병·사드 사태와는 다른 양상
‘탈진실 시대’의 과학 소통법 주목
최근 월성원전 삼중수소를 둘러싼 논란도 광우병과 사드 괴담의 데자뷔가 될 뻔했다. 월성원전 부지 내 집수정에서 기준치를 넘는 삼중수소가 발견됐다는 한 지역방송의 보도에 원자력 공학자들과 탈원전 세력 간의 공방이 벌어졌다. 그런데 분위기는 과거 광우병 파동이나 사드 논란 때와는 조금 달랐다. 민관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하기로 하는 등 논란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탈원전 진영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증폭되는 상황은 아니다. 조사단에 원자력 전문가들이 포함된 것 자체가 그 증거다. 삼중수소 논란은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 아닌 과학적 검증과 토론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무엇이 괴담을 조기 진압했는가. 만연한 가짜뉴스에 대한 효과적 대응과 관련해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고인 물 두고 ‘배출' 기준 위반 시비
팩트부터 짚어 보자. 문제의 물은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다. 71만Bq이 검출된 물은 ‘배출된’ 물이 아니라 ‘배출 전 고여 있는’ 물이었다. 배출할 때는 해수로 희석해 배출 농도 기준인 리터당 4만Bq보다 훨씬 낮은 13Bq 수준이 된다. 삼중수소가 지하수에 섞여 원전 밖으로 나갔다는 의혹도 사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인근 지하수나 해수의 삼중수소 농도는 빗물보다도 낮았다. 언론중재위는 “삼중수소 농도를 배출 기준의 18배로 표현할 수 없으며, 방사능에 오염된 지하수가 원전 부지 바깥으로 퍼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한국수력원자력의 반론 신청을 받아들였다.
의문은 남는다. 삼중수소 농도가 그 정도로 치솟은 까닭은. 한수원 측은 시설 누수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이후에는 그런 현상이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용훈 KAIST 교수는 “고인 물이 증발하는 과정에서 공기 중 삼중수소가 녹아 들어가면서 농도가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흥대 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장도 “원인을 찾던 중 관련 논문 하나를 찾았다. 이에 근거해 1리터의 물을 75일 동안 대기 중에 놓아두는 증발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삼중수소 농도가 최대 1800배 높아진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물론 정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합리적 추론을 외면한 채 흥분해서 덤벼들 일은 아니다.
호응 못 얻은 탈원전 세력의 공세
우선, 원자력 과학자들의 적극적 대응이다. 보도 직후 정치권과 탈원전 세력의 공세에 원자력 전공자들은 SNS와 언론 매체를 통해 이들 주장의 비과학성과 비합리성을 지적했다. 과학자 출신은 아니지만 정재훈 한수원 사장도 “팩트와 과학적 증거에 기반을 두지 않고 극소수 (환경) 운동가가 주장하는 무책임한 내용이 확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현 정부에 의해 임명된 한수원 사장이 여당에 반기를 드는 모양새는 이례적이다. 압권은 ‘멸치 1g 또는 바나나 6개’다. 정용훈 KAIST 교수는 “주민 소변에서 검출된 삼중수소 방사선량은 최대치로 따져도 0.0006 밀리시버트(mSv)로, 그 정도 음식을 먹었을 때 받는 피폭량과 같다”고 정리했다. 공포를 부추기는 호들갑스러운 공세가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둘째, 탈원전 세력의 어설픈 지식 체계다. 삼중수소 보도 직후 민주당과 탈원전 운동가들은 자책골을 남발했다. “삼중수소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공원소”라든가 “원전 인근 주민 한 사람 몸에서 1~2g의 삼중수소가 나온다”는 발언이 대표적 예다. 삼중수소는 우주에서 오는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宇宙線)과 대기 물질의 상호 작용으로 연간 200g 이상 만들어진다. 정 교수는 “월성원전이 1년간 배출하는 삼중수소가 0.4g인데, 어떻게 한 사람 몸에서 1g이 나오냐”고 반격했다. 상식 이하의 발언이 탈원전 세력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셋째, 정치적 의도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여당과 탈원전 세력의 공세는 월성원전을 둘러싼 감사와 수사를 공격하기 위한 여론전 성격이 짙었다. 감사원장에 대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냄새’ 발언, 여당 대변인의 감사원과 검찰에 대한 공격 논평 등이 의구심을 더했다. 문제 제기의 ‘진정성’이 인정받기 힘들었다.
광우병·사드 사태의 학습효과
‘멸치 1g, 바나나 6개’는 감성적 프로파간다에 맞서 과학 진영이 오랜만에 날린 ‘카운터 펀치’라 할만하다.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팩트와 감성을 결합한 강렬한 ‘카피’(문구)였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일반인들에게 일상생활의 방사선 피폭량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한 효과적 비유이자, 원전 위험성을 과장하는 세력들에겐 충격을 안겨 준 일격”이라고 평가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전문적인 과학 지식을 대중들에게 전하는 방식이다. ‘정확하게’는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탈진실’ 시대, 사실과 지식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식은 이성과 과학 진영의 고민거리다. 참과 거짓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복잡한 수치와 개념의 체계인 과학이 정치와 엮일 때 그 위험성은 더욱 높아진다. 진실을 지키려는 과학계가 대중과 호흡하는 효과적 방법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모르면 속는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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