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운영 빨간불②] 정세균 산업부 치하, '영혼없는 공무원' 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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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1.30. 오전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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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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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444건 무단 파기했는데…'적극행정' 상패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는 '통치행위'" 주장도
"공무원이 겁없이" "감히 명을 거역" 점입가경
전체주의 체제 뒷받침했던 구시대적 공직관
정세균 국무총리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정세균 국무총리가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을 주도하고 관련 증거까지 인멸한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산업정책과를 직접 찾아가 '적극 행정 접시'라는 상패를 줬다. "힘든 일을 처리해 수고가 많았다"고 노고도 치하했다.

산업부는 지난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를 축소 조작하고, 이것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감사 당일 새벽 세종청사 사무실에 잠입해 청와대 보고 자료 등 444건을 무단 파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러한 부처를 정 총리가 직접 찾아가 '적극 행정'이라며 상까지 준 것은 당정청이 낡은 공직관을 맹종하는데 있어서 '한몸'임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성윤모 산업부 장관을 향해 "이번 감사에서 산업부 직원의 면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장관 차원에서 적극 행정을 펼친 직원을 슬기롭게 처리해달라"고 요구했다.

감사를 앞두고 자료를 무단 파기한 게 '적극 행정'이라면 이들을 '슬기롭게 처리'하기 위해 여당 의원이 요구한 '장관 차원'에서 나선 게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총리 차원'에서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령에 따른 실무 관료를 감싸기 위해 '적극 행정'의 개념을 변조했다면, '탈원전' 자체를 비호하기 위해서는 '통치행위'라는 개념이 동원됐다.

양이원영 민주당 의원은 지난 1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종합정책질의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향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는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보느냐"고 물었다. 이에 추 장관은 "통치행위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통치행위란 헌법학에서 고도의 정치성을 띈 대권행위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영역을 가리킨다. 대체로 '통치행위' '공무원의 명령에 따른 행위로 면책' 등의 개념은 독일의 헌법학자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 헌법관에 따를 때 잘 설명되는 개념이다.

"권력의 활동은 제도가 아니라 결단"이라고 역설했던 슈미트의 헌법관은 나치와 궁합이 맞는 측면이 있어, 슈미트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 헌법학 교수로 있으면서 나치에 부역하다가 1945년 독일의 패전 이후 전범재판으로 교수직을 상실했다.

나치에 악용됐기 때문에 '통치행위' 개념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법심사에서 배제되는 영역이 엄격하다.

우리 대법원은 2004년 이른바 대북송금사건의 판결에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자체는 '통치행위'로 보면서도, 이에 수반해 북한에 불법 송금을 한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프랑스 국참사원(Conseil d'État)도 1962년 샤를 드 골 대통령의 헌법상의 개헌 절차 무시와 국민투표 부의, 의회 해산 등 일련의 대통령 대권 발동에 대해, 대권 발동 자체만 '통치행위'로 인정했을 뿐, 그에 수반한 각종 행정행위들은 모두 사법심사가 가능하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르면, 설령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결단' 자체가 '통치행위'로 인정되더라도, 이에 수반해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를 조작하거나 감사를 앞두고 444건의 자료를 새벽녘에 무단 파기한 행위 등은 모두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 게 명백하다. 총리가 상패를 줄 게 아니라 검찰에 고발해 기소되고 처벌받아야 할 범죄 혐의인 것이다.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 헌법관에 따르면, 독일의 통치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전형적인 '통치행위'의 영역이다. 실무 관료들은 '통치행위'에 따른 명령을 수행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전범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면책 주장은 인용된 사례가 없다. '적극 행정'이라 해서 상패를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홀로코스트 실행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 시종 히틀러나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등의 지시만 수행했을 뿐,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항변했다.

재판 과정을 지켜본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평범한 실무 관료로서의 모습에 충격받아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을 탈고하기도 했다. 아이히만의 항변은 인용되지 못하고, 그는 교수대에 섰다.

8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프란츠 슈탕글 소장도 1967년 뒤셀도르프 전범재판에서 "나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서독 재판부는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종신형을 선고했으며, 슈탕글은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처럼 전전(戰前)의 전체주의 체제를 뒷받침하던 '통치행위' '명령에 의한 공무원 면책' 개념은 이미 국내외적으로 퇴조했는데도 문재인정권과 민주당, 이른바 당정청만 '영혼 없는 공무원'을 요구하는 구시대적 공직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2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대관절 어느 공무원들이 이렇게 집단행동을 겁없이 감행할 수 있느냐"고 한 것이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올해초 "총장이 나의 명을 거역했다"고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정세균 총리의 산업부 원전산업정책과 방문과 노고 치하, 신영대 민주당 의원의 '적극 행정, 슬기롭게 처리' 요구, 양이원영 민주당 의원의 '통치행위' 주장 등도 전체주의 체제에서의 헌법관·공직관과 맥락이 닿아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신 체제 때까지는 결단주의 헌법관이 만연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루돌프 스멘트의 통합주의 헌법관을 주장해 결단주의 헌법관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최근 법률신문과의 대담에서 현 집권 세력의 구시대적인 공직관을 통렬하게 논박했다.

허영 교수는 집권 세력을 겨냥해 "'감히 내 명을 거역했다'는 발언에서 보듯 공무원이라는 특수한 신분 관계를 19세기적인 명령·복종의 특별권력관계로 인식하는 것 같다. 이는 구시대적인 공직관"이라고 비판하며 "오늘날의 민주적인 공직제도는 명령·복종의 특별권력관계가 아니라, 공직수행에 필요한 특별한 생활질서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데일리안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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